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마쿠라 시대 (문단 편집) === [[겐페이 전쟁]]과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 === [[헤이안 시대]] 말기에 [[타이라노 키요모리]]를 중심으로 한 타이라 가문으로 구성된 [[헤이케]]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이에 못지 않은 무력을 가진 [[미나모토]] 가문이 존재하고 있었다. 타이라 가문의 집권에 반발하고 있던 세력들은 1177년 [[교토]]의 시시가타니에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으나('''시시가타니 음모사건'''), 1180년, 모치히토 왕이 타이라 가문에 맞서 봉기했다. 모치히토는 [[나라현|나라]]로 탈출해 미나모토씨에 기댔으나 결국 붙잡혀 패배하고 처형당했다.[* 모치히토는 [[친왕]] 칭호조차 받지 못해서 모치히토왕, 즉 조선시대식으로 말하자면 대군도 아닌 군호만 받은 상태였다. 그리고 모치히토가 타이라 가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도, 모치히토에게만 친왕 칭호를 내려주지 않아서인 것도 있다.] 타이라 가문과 쌍벽을 이루고 있던 미나모토 가문은 1159년 [[헤이지의 난]][* 겐페이 전쟁을 길게 보는 측에서는 이때부터를 원-평 양씨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.]에서 타이라 가문에 패배하면서 [[미나모토노 요시토모]]가 살해당했고 요시토모의 아들인 요리토모는 생포되어 이즈로 유배되었으나, [[호조씨]]와 혼인동맹을 맺는 등 이때는 충분히 세력을 회복하고 모치히토 왕자의 봉기에 동참하여 1180년 8월 군사를 일으켰다. 그 과정에서 요리토모는 '''이시바시산 전투'''에서 패배했지만 반(反) 타이라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, [[간토]]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두고 본격적으로 타이라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. 이후 '''스모마타가와(후지천) 전투'''에서 승리한 요리토모는 간토를 본격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. 때마침, 키요모리가 1181년 병사했다. 열세였던 미나모토씨는 1183년의 '''쿠리카라 전투'''에서의 [[미나모토노 요시나카]]의 승리로 전세를 뒤집게 된다. [[파일:external/www.ranhaku.com/2_03senjin.jpg]] 한편 요리토모의 사촌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1183년 말 가장 먼저 [[교토]]에 입성해 타이라 가문을 추방했지만 다음해 정월 수도를 불태우는 등 전횡을 일삼았고 이를 우려한 [[고시라카와 덴노|고시라카와 태상황]]은 요리토모에게 교토 입성을 요구했다. 그러나 되려 요리토모는 [[도고쿠|동국]](간토와 그 인근)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해줄 것을 요구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. 요리토모는 '''우지 강 전투'''와 '''아와즈 전투'''에서 승리해 요시나카를 살해하고, [[삼종의 신기]]를 가지고 [[세토내해]] 방면으로 도주한 타이라씨와 [[안토쿠 덴노]]를 지금의 [[시모노세키]]인 '''단노우라 해전'''에서 몰살시켰다. 타이라씨 일족과 안토쿠 덴노 등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, 삼종의 신기의 진품도 이때 없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